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백악관에 살지 않은 충격적 이유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오늘날 워싱턴 D.C.의 이름이 된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워싱턴 대통령은 백악관(The White House)에서 단 하루도 거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역사적 기록을 통해 명확히 확인됩니다. 이 의외의 사실은 미국의 초기 수도 이전 과정과 백악관의 건설 시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의 임기는 1789년 4월 30일부터 1797년 3월 4일까지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수도는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옮겨졌으며, 현재의 워싱턴 D.C.는 아직 완전히 기능하는 수도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의 공식 명칭인 ‘대통령의 집(President’s House)’은 워싱턴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입주 가능한 상태로 완공됐습니다.
따라서 워싱턴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가 건설되는 과정을 감독했지만, 정작 그 수도의 상징인 백악관에 입주할 기회는 갖지 못했습니다.

임시 수도 시절,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의 대통령 생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미국의 공식 수도는 뉴욕 시였습니다. 1789년 4월 30일, 워싱턴 대통령은 뉴욕의 페더럴 홀(Federal Hall)에서 취임 선서를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관저는 뉴욕의 프랭클린 하우스(Franklin House)였으며, 이후 오스굿 하우스(Osgood House)와 맥콤 하우스(Macomb’s Mansion) 등 임시 거처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영구적인 수도의 위치를 결정해야 했고, 남부와 북부 주들 간의 치열한 정치적 타협 끝에 1790년 ‘거주법(Residence Act)’이 통과됐습니다. 이 법에 따라 영구 수도가 포토맥 강변에 설립되는 동안, 필라델피아가 10년 동안 임시 수도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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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임시 수도 시절의 대통령 관저
1790년부터 1800년까지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임시 수도였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필라델피아로 거처를 옮겨 6번가와 마켓 스트리트에 위치한 ‘대통령의 집(President’s House)’에서 임기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이 필라델피아의 관저는 현재의 백악관처럼 공식적인 대통령의 거주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이곳에서 행정부를 이끌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며, 2차 임기까지 모두 필라델피아에서 마무리했습니다. 따라서 워싱턴 대통령의 공적인 삶은 백악관이 아닌,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임시 관저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백악관 건설 착수와 워싱턴의 감독
영구 수도인 워싱턴 D.C.의 부지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직접 선정하고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1791년, 워싱턴은 프랑스 출신 엔지니어 피에르 샤를 랑팡(Pierre Charles L’Enfant)에게 도시 설계를 맡겼고, 1792년에는 ‘대통령의 집’의 설계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제임스 호번(James Hoban)의 설계가 채택되어 그해 10월 13일에 백악관 건설이 공식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건설 과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건물의 규모와 디자인에 대한 세부적인 지침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집이 미국의 위상을 반영하는 웅장하고 영구적인 구조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건설 작업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됐고, 워싱턴 대통령이 1797년 3월에 퇴임했을 때까지 건물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존 애덤스 대통령의 첫 입주와 수도 이전의 완성
조지 워싱턴의 뒤를 이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는 백악관에 입주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록됩니다. 1800년 11월 1일,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 D.C.로 수도가 공식적으로 이전되면서 애덤스 대통령은 미완성 상태였던 백악관에 입주했습니다. 당시 백악관은 외벽만 완성됐을 뿐, 내부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불편함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애덤스 대통령의 부인인 애비게일 애덤스(Abigail Adams) 여사는 당시 백악관 내부가 너무 추워서 불을 피울 장작을 직접 날라야 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백악관은 워싱턴 대통령의 임기 후 3년이 지난 시점에야 비로소 대통령의 거처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 D.C. 건설의 역사적 의미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백악관에 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건국 초기의 정치적, 행정적 과도기를 상징합니다. 워싱턴 D.C.가 최종적으로 수도로 확정된 것은 북부와 남부 주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려는 복잡한 정치적 거래의 결과였습니다. 특히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 사이의 ‘1790년 타협(Compromise of 1790)’은 연방 정부가 주 정부의 부채를 인수하는 대신, 남부 지역인 포토맥 강변에 영구 수도를 건설하기로 합의한 핵심 사건이었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이 합의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수도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미국의 영구적인 정치 중심지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그는 자신이 계획한 백악관에서 살지 못했지만, 그의 비전과 노력이 현재의 워싱턴 D.C.를 탄생시킨 근본적인 동력이 됐습니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백악관 건설을 직접 지휘하고 수도 부지를 선정하는 등 워싱턴 D.C.의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의 임기가 백악관 완공 시점보다 먼저 끝났기 때문에 백악관에 거주하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의 첫 입주자는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였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미국의 초기 건국 과정에서 수도를 둘러싼 정치적 타협과 행정적 어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워싱턴 대통령이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임시 관저에서 국가를 이끌었던 기록은 미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조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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