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지는 단순 노폐물 아니다: 억지로 파내면 안 되는 이유
샤워 후 귓속이 젖었을 때, 혹은 왠지 모를 찝찝함이 느껴질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면봉을 집어 듭니다. 귓속을 파내고 뭉텅이로 묻어 나온 귀지를 확인하는 순간, 왠지 모를 개운함과 함께 청결함을 되찾았다는 만족감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그 개운함은 잠시, 며칠 뒤 귓속이 가렵고 통증이 느껴지거나 심지어 진물이 흐르는 경험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우리는 귀지를 단순히 더럽고 제거해야 할 노폐물로만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귀지는 귓속 환경을 지키는 최전선의 방어막이자, 세균 침투를 막는 ‘천연 항생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귀지 제거 습관이 사실은 귓속 건강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였다면,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요?

귀지는 왜 생기는가: 외이도를 지키는 방패
귀지(Cerumen)는 단순한 먼지 덩어리가 아닙니다. 이는 외이도(귓구멍에서 고막까지의 통로) 피부에 존재하는 피지선과 아포크린 땀샘에서 분비된 물질에 탈락한 피부 세포, 먼지 등이 섞여 만들어진 복합 물질입니다. 귀지의 주성분은 지방산, 알코올, 스쿠알렌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성분들이 귓속 피부를 보호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귀지가 귓속에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보호’입니다. 귀지는 끈적이는 성질을 이용해 외부에서 유입되는 미세먼지, 이물질, 벌레 등을 포획하여 고막까지 도달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마치 귓속에 설치된 끈끈이 트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귀지는 외이도 피부에 천연 보습막을 형성하여 건조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귓속 피부의 pH를 약산성(pH 6.1~6.8)으로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약산성 환경은 곰팡이나 박테리아가 번식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하여 외이도염과 같은 감염성 질환을 예방하는 첫 번째 방어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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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 항생 물질의 비밀: 세균 침투를 막는 힘
귀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방어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강력한 항균 작용을 수행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귀지에는 라이소자임(Lysozyme)과 같은 항균 펩타이드가 포함돼 있습니다. 라이소자임은 세균의 세포벽을 분해하는 효소로, 특히 포도상구균이나 대장균 같은 흔한 병원성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입니다. 귀지가 마르면서 노란색을 띠는 것도 이러한 지방 성분과 항균 물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면봉이나 귀이개로 귀지를 억지로 파낼 때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보호막을 제거하는 행위 자체에 있습니다. 보호막이 사라진 귓속 피부는 급격히 건조해지고 pH 균형이 깨져 세균이 번식하기 쉬운 알칼리성 환경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외이도염 발생 위험이 크게 증가하며, 면봉 사용 시 발생하는 미세한 상처는 세균의 침투 경로를 제공하여 염증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귀지를 파내는 행위는 단순히 노폐물을 제거하는 차원이 아니라, 귓속의 천연 면역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귀지의 중요성에 대해 정광윤 서울 민병원 이비인후과 원장은 “면봉을 이용해 귀지를 파내는 행위는 귀지를 고막 쪽으로 밀어 넣어 귀지가 뭉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외이도 피부에 미세한 손상을 입혀 만성적인 외이도염을 유발하는 가장 흔한 원인”이라며, “귀지는 귓속 피부의 움직임과 턱관절 운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배출되도록 설계됐으므로, 억지로 제거할 필요가 없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귀지 제거, 꼭 필요할 때만: 전문가의 조언
귀지는 대부분 스스로 배출되는 ‘자정 작용’을 통해 관리됩니다. 귓속 피부는 고막에서 귓구멍 방향으로 이동하는 특성이 있으며, 우리가 음식을 씹거나 말을 할 때 발생하는 턱관절의 움직임이 이 귀지를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이라면 귀지 관리를 위해 별도로 면봉이나 귀이개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귀지 제거는 귓속 입구에 보이는 부분만 물에 적신 수건 등으로 살짝 닦아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귀지가 과도하게 생성되거나 자정 작용에 문제가 생겨 귀지가 외이도를 완전히 막는 ‘귀지전(Earwax Impaction)’ 상태가 됐다면 전문적인 제거가 필요합니다. 귀지전은 청력 감소, 이명, 귀 통증 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보청기를 사용하는 경우나 귀지가 습한 유형인 경우 귀지전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이 경우에도 집에서 억지로 파내려 시도하기보다는 이비인후과를 방문하여 안전하게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비인후과에서는 흡입기나 특수 기구를 사용하여 귓속 피부에 손상을 주지 않고 귀지를 제거합니다.
결론적으로, 귀지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보호 대상입니다. 귀지를 억지로 파내는 습관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귓속 환경은 훨씬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귀지를 파내는 행위는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귓속의 방어 시스템을 무너뜨려 각종 염증과 감염의 위험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명진 명이비인후과의원 원장은 “귀지를 파내고 싶다면 면봉 대신, 귀지 용해제와 같은 전문 제품을 사용하거나,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이비인후과를 방문해 귀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현명하다”면서, “귀지는 단순한 노폐물이 아니라 귓속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파수꾼임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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